※ 좀 깁니다.
※ 개인 해석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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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그런 거울을 들여다보면, 아름다운 것이 보인다.
무엇이 보이는가? 당연히 나 자신, 세상 무엇보다도 자랑스러운 나 자신!
정통성 있고 깨끗한 나 자신이 보인다. 호수보다 거울보다 맑고 순수한... 더러움과 오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자랑스러운 거울상.
나는 살아있는 유물이다. 먼 옛날부터 정통성을 지켜온 나의 가문의 피가, 내 몸에 흐르고 있다. 선조와 같은 피가 내 몸에는 흐르고 있다.
감히 더럽고... 흙탕물처럼 흐릿하게 태어난 피들과는 다르지.
그 뿐만인가?
나란 존재는 고귀한 데다가, 유능하기까지 하다. 도마뱀 왕가의 피를 이어받은 순수한 존재라는 것으로도 모자라, 능력까지 좋다는 것이다.
이 왕국에서 내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없다. 요컨데, 나는 남을 곧잘 휘어잡는다.
권력으로? 아니, 거기까지 할 필요도 없다. 머리를 몇 번 굴리고 혀를 놀리기만 해도, 저들은 귀를 기울이고 손발을 바삐 움직인다.
저들이 백치인 것인가, 아니면 내 언변이 훌륭하고도 감동적인 것인가. 답은 간단하지, 둘 다 옳고도 확실한 사실이다!
그 뿐만인가?
나는 관대하기까지 하다.
저 더러운 핏줄들, 진흙을 먹고 사는 벌레 만큼이나 천박한 도마뱀들! 닿는 것도 불결한 잡종들! 나는 그런 것들에게 나는 감히 상종을 허락해줄 수 있다.
그래, 아주 놀랍겠지! 얼마나 자비로우면 피 대신 흙탕물이 흐르는 것들이 입을 여는 걸 허락해줄 수 있을까, 그런 감탄이 나오고 있겠지!
그렇다. 나는 물론 자비롭고 마음은 사막처럼 넓으니, 저런 것들을 위해 미소를 지어줄 수 있는 것이다.
오, 혹시라도 이러한 추태에 대해 나를 폄하할 지도 모르는 귀족들이 있다면 나는
" 나는 물론 진정으로 잡종들과 어울릴 생각은 없다오! 흙탕물과 피, 머리 없는 백치와 지식인을 동급이라 여기는 것은 크나큰 모욕이지. 허나 돌가루도 약에 쓰려면 없듯, 저들도 쓸 일이 있을 것 아니겠소? 내 수치와 불결함을 무릅쓰고 친히 저들을 쓸모 있게 하려는 것이니 양해해주길 바라오. 아직도 불만이 있다면, 다음 번 연회장에 모일 때 내 친히 들어드리리다. "
하고 답하며 웃겠다.
요컨데 나는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순혈 왕족이고, 도마뱀들의 훌륭한 선동가이며, 자애로운 마음을 가진 군자이기도 하다.
이렇게나 완벽한데, 내가 나 자신의 존재를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면 이상한 것이지.
누구보다도 자랑스러운, 순수한 피를 이어받은 왕족인 나 자신. 나는 내가 도마뱀 왕국의 이구아곤이라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다.
...그래, 하지만 순수한 것은 더러운 것에 물들기도 쉽지.
요즘은 그 흙탕물들, 잡종 도마뱀들이 늘어나고 있다. 순수한 피를 저버리고 스스로 천한 것이 되려 자처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말이다.
쨍그랑. 거울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파편이 낙엽 스러지듯 바닥으로 떨어졌다. 둥그랬던 거울은 나를 담을 정도로 맑지 않다, 흐리다.
어째서?
어째서 순수함을 저버리려는 것이지? 순수 혈통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깨끗하고 고결하다, 내가 그 증거다. 내가 그 증거야!
그런 것은 포근한 비단 요람에서 벗어나 스스로 진흙탕에 들어가려는 것과 다름이 없다. 어리석다 못해, 왕국의 정통성을 깨트리는 일이다.
왕국이 흔들린다, 민중이 흔들린다, 귀족이 흔들린다... 그렇게 되면 왕국은 혼란에 빠진다.
...다 그 흙탕물 같은 도마뱀 탓이다.
쫓아내도 기어이 일을 저지르고, 우리에게 위협을 가하고야 마는군 그래.
하지만 네가 무얼 할 수 있겠어? 정통성도 없이 여러 피가 섞여 태어난 너보다는, 순수하게 태어난 내가 더 우월하다.
흐리디 흐린 거울 파편을 내려다보았다, 그 속에서 선명하게 빛나는 건 나 뿐이다.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황금 장신구는 빛을 받더니 태양보다 빛난다.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그래, 내가 그 도마뱀보다 우월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고민할 것 없다. 기세가 기우는 것을 막기 위해 내가 해야 할 것은 하나 뿐이다.
내 세계에서 밀어냈음에도 여전히 이 나에게 피해를 끼친다면, 이번엔 이 세계에서 완전히 닦아내버리면 된다.
거울은 깨져버리면 더 이상 둥그렇지 않다, 하물며 더 이상 거울의 역할을 수행할 수도 없다.
쓸모가 없어지면 밀려나다 못해 도태되고, 마침내는 버려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돌이킬 수 없이 파멸하게 되지.
도마뱀 왕가와 순수한 혈통에 맹세코, 내 친히 그렇게 만들어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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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뱀 왕국 세계관이 갑자기 눈에 잡혀서 써봤습니다.
거들테일이랑 이구아곤 둘 중에서 고민했는데 이구아곤이 단순하게 자존감 높고 편파적인 악역 캐릭터라 쉽기도 하고, 쓸 때 재밌어서 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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